누군가에게 ‘가족’이란 괜히 입을 놀려 듣는 이에게 불쾌한 감정만 들게끔 무례함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개념이었다. 플란넬이 그랬다. 그가 전자 반려동물인 에뮤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세상은 텅 비어버린 부모나 조부모의 빈자리를 보며 안타깝게 혀를 찼다. 그런 이유로 플란넬도 익숙하게 상대를 비꼬며 웃어 넘겼다. 그마저도 일상이었다.

그러나 두 발로 걷고 돈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생물인 탓에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란, 억울할 정도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타인이 필요로 했다.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인지. 도트가 큼지막하게 보이는 플러피의 목을 감싸 안을 때마다 플란넬은 기억에서 희미해져 더는 볼 수 없는 이들이 가끔씩 떠올랐고, 또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가상 생물보다 더 와닿지는 못했다.

그런 이유로 가족, 더 나아가 타인과 쌍방향으로 오가는 긍정적인 감정은 플란넬에게는 사치품에 가까웠다. 보기 좋게, 갖고 싶게끔 꾸며져 진열대에 장식되어 있지만 터무니 없는 가격표가 달려 있음을 이미 알고 있어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는 갖고 싶어 결점으로, 냉소를 곁들인 빈정거림으로 삐져나온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었으며, 이는 플란넬보다 더 어린 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파토데아, 혹은 더 애정이 담긴 플레미로 불리는 이는 플란넬에게 당연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갖고 있었다. 거기에 3 블록씩이나 떨어진 자신을 또 어떻게 알고 이웃이라는 범위에 넣어두는 그 자신감이란, 도무지 플란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다행히 의문은 울루루 대회가 부흥하며 풀리게 되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있는지. 경기에 늦어 급하게 가다가 부딪혔던 목요일부터, 수많은 관객들 앞에 표를 팔아 가족의 남은 흔적이었던 조모의 집을 사기까지의 과정은 플란넬에게 죽기 전까지 떠들어도 질리지 않을 이야기가 되었다.

떠보지도 않았던 진열장의 비품은, 어느 새 플란넬의 가죽 재킷 주머니 속에 놓인 집 열쇠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러니 욕설 몇 마디에 왁왁거리며 펄쩍 뛰거나, 저 자신을 꽉 끌어 안고선 쉽게 놔주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을 플란넬은 받아들이고, 이해했다.